
그동안 미술사학계에서 한국 근대미술의 기점에 대한 논의가 꽤 진행되어왔습니다. 근대미술 연구가 양적 질적으로 급성장을 이룬 시기는 1988년 월북 예술가(문인 포함)에 대한 ‘해금 조치’ 이후입니다. 이 조치가 발표되기 전까지는 월북한 작가, 간첩 혐의를 받았던 작가 등이 반공 논리, 치안 질서에 밀려 언급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쾌대의 부인인 유갑봉 여사는 북에서 이쾌대에 관한 소식만 들려와도 남산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으셨죠.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1980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해금 조치 이후 남편의 작품세계가 조명받는 것을 못보고 가셨다는 점이 아쉬울 뿐입니다. 해금 조치 이후 월북 작가를 포함하여 본격적인 근대미술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해금 조치를 떠나 시기상으로도 미술사 영역에서 연구를 할 때가 되긴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동시대 미술가였으니까요.

2000년대가 되면 미술사 관련 학회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이 근대미술의 기점을 이 때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크게 3개의 주장으로 나뉩니다.
- 1890년대설
1890년대설은 역사학계와 궤를 같이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고종이 조선왕조를 끝내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해가 1897년이고 이에 앞서 갑오개혁(1894년)을 실시하며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궁중화원 제도인 도화서가 폐지된 것도 이 때이고, 신문물이자 회화를 대체할 매체인 사진이 처음 도입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유럽이나 일본처럼 국가 전반적으로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대내외 상황 속에서도 전통을 지키며 새로움을 더하려는 노력이 인정되어 이 시기를 근대미술의 기점으로 여기는 학자들이 가장 많습니다.
- 1910년대설
1910년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근거로 우리나라 1호 서양화가인 고희동이 1909년에 일본에 유학을 간 점을 우선 꼽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까지는 화가가 그림을 배우는 방식이 스승에게 개인적으로, 혹은 도화서에 들어가 생도로 시작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이에 반해 1912년에 근대의 미술학교 컨셉인 서화미술회 강습소가 개설된 점도 근대적인 요소라 평가합니다. 1913년에는 평양에서 기성서화미술회가 개설되었죠. 이 때 신문광고를 보면 1, 2학기 제도, 여름과 겨울방학 실시 등 지금과 유사한 운영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서구의 인상주의, 고전주의 화풍이 일본에 간 유학생들을 통해 서서히 유입되었다는 게 1910년대를 근대의 기점이라 여기게 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 1920년대설
1920년대는 다른 시기보다 미술의 변화에 가장 초점을 맞춘 학설입니다. 사실 1890년대에도 서양화는 유입(조금 더 넓게 보면 18세기 영조와 정조연간에 이미 청나라를 통해 서양화법을 수용한 바있습니다)되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주체적으로 소화하기 시작한 건 1920년대가 맞습니다. 1910년대에 드문드문 몇몇 화가들이 일본에 가서 서양화를 배워온 후에 1920년대에 이르러 널리 퍼지기 시작했거든요. 무엇보다 일제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1922년에 유럽의 살롱전을 닮은 《조선미술전람회》가 시작한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또한 전통미술과 새로운 미술 공동의 발전과 동서양 미술 연구를 통해 화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근대화를 꾀한 서화협회도 이 무렵(1918년)에 설립되었습니다. 덕분에 전통산수를 서양회화식으로 개량한 사경산수, 본격적인 유화 제작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이 시기의 작품들을 보면 확실히 전통 회화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1920년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미술의 양식을 중심으로 보아 이 때를 진정한 근대의 시작이라고 주장합니다.
근대미술의 기점에 대해 각 시기별 주장을 간략하게 소개해드렸는데 여러분은 어느 시기에 마음이 더 기우시나요? 이미 개최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동녘에서 거닐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 가을에 덕수궁관에서 개최 예정인 《장욱진》 특별전 등 앞으로 근대미술 전시는 더욱 많아질 예정입니다. 세 시기 모두 합당한 근거를 갖고 있고 학설에 정답이라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이 중 하나를 기준으로 삼으시면 앞으로 근대미술 관련 전시를 볼 때 조금 더 짜임새있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에 잡힐 듯 안잡히는 흐릿한 근대라는 시기를 한 번 정리해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