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이면

기록의 이면

우리는 기록을 믿는다. 작가가 남긴 일기, 편지, 인터뷰는 작품을 해석하는 가장 강력한 열쇠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기록하는 손 뒤에 숨은 의도다.

나는 공개적인 SNS는 물론, 나만 보는 내 노트에도 생각을 정제해서 쓴다. '정제한다'는 말은 내용을 다듬어 쓰는 행위이지만 나의 취약함, 부끄러운 실수,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비겁함을 뺀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나조차 나를 직면하기 두려워 편집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직시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요즘 '브레인 덤프', '모닝 페이지'와 같은 적나라한 쏟아내기가 유행하는 듯하다. 현재의 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다음을 대비할 수 있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되는 글쓰기 방식이다.

수백 년 전, 혹은 수십 년 전의 작가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의식해야 한다. 그들이 남긴 유려한 문장과 숭고한 예술론 속에는 차마 글에 옮기지 못한 개인적인 욕망과 결핍, 감추고 싶었던 시대적 한계가 촘촘히 박혀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록은 객관적인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작가가 세상에게 기억되고 싶어 했던 편집된 자아의 투영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작가의 말과 글을 액면 그대로 인용하고, 그것을 작품의 절대적인 정답으로 받들어 해석을 끝낸다면 모든 인문학의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 행간을 읽어야 하고, 취지를 유추해야 하며, 이 기록을 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문학은 문학작품을, 철학은 개념을, 사학은 사료를 프레임삼아 이면을 해석한다. 미술사는 미술작품을 프레임삼아 기록에 담기지 않은 이면을 들여다보는 학문이다.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되, 그 목소리에 감춰진 시각적 증거, 즉 조형언어에 주목해야 한다. 텍스트로 말하지 않더라도 캔버스 위의 안료는 작가가 걸어온 길과 무의식을 담아 흔적을 반드시 남기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다. 다만 정답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과 합리적인 과정이 수반되면 좋은 해석이라 평가받는다. 작가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그 이면의 진실을 재구성하는 상상이 합당하다 여겨질 때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사안을 바라보는 시선의 성장은 미술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보너스와 같은 축복이 되어줄 것이다.

Read more

고려시대에도 백자는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청자는 있었다.

고려시대에도 백자는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청자는 있었다.

호림박물관에서 일할 때 고려백자를 전시하며 묘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분명 흰색 백자인 건 맞는데 톤이 조선백자와 달랐달까요? 조선백자는 쨍하고 투명한 흰색이 많은 데 반해 고려백자는 글씨를 지울 때 쓰는 하얀 수정액 느낌이었죠. 조선백자 안에서도 흰색이 여러 갈래인데 고려백자는 또 다른 결이었습니다. 이때 색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는 점에 대해 새삼

By Lee Janghoon
도쿄도미술관의 《백화요란 - 바다를 건넌 에도 회화》 전시를 볼 때 알아두면 좋은 점

도쿄도미술관의 《백화요란 - 바다를 건넌 에도 회화》 전시를 볼 때 알아두면 좋은 점

일본 미술의 명품을 보려면 일본 외에 어디로 가야 할까요? 아마 많은 분들이 파리를 먼저 떠올릴 겁니다. 실제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미술은 '자포니슴(Japonisme)'이라는 용어가 확립될 정도로 일본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현재 파리의 기메미술관은 유럽 최대의 아시아미술 컬렉션을 자랑하고, 일본미술만 1만 점이 넘습니다. 우리나라 미술품도 많이 소장한

By Lee Janghoon
'기운생동'이 뜬구름처럼 느껴진다면

'기운생동'이 뜬구름처럼 느껴진다면

‘기운생동’은 원래 인물화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미술사를 공부할 때 이해는 되지만 뭔가 뜬구름 같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 개념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보시면 구체성을 갖게 됩니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은 미술 작품에 대해 말할 때 보통 “생동감이 있고 실감난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일상에서도 사용하죠. 그런데 정확하게 무엇을 보고 “기운생동하다”고 할

By Lee Janghoon
논문으로 강의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이유

논문으로 강의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이유

직장에서 나와 독립할 당시 하고 싶었던 일은 크게 세 가지였다. "글을 쓰는 일상을 영위하자" "1년에 한 번은 좋은 사람들과 아트 투어를 가자" 그리고 "좋은 논문을 소개하자"였다. 공부를 계속 하면서 ‘이렇게 좋은 연구성과가 많은데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니’라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나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By Lee Jangh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