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청사기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행되던 시절의 ‘바쁨’을 잘 보여준다. 400년 넘게 유지되던 왕조가 새로운 왕조로 바뀌었으니 국정을 운영하는 관료들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일상의 변화가 바쁘게 변해가는 모습이 느껴졌을 것이다. 우선 수도가 한양으로 내려가고 사람들의 옷이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불교 중심의 세계관에서 유교로 이행하는 과정 속에서 혼란스러움마저 있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청자를 만드는 도공들에게도 변화의 요구는 찾아왔다. 조선이 개국한 직후에는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상감청자를 계속 만들어서 괜찮았다. 오히려 실생활에 사용하기 편한 도자를 많이 만들라는 지침이 내려와 조금 더 간편하게 만들고 많이 팔 수 있어 좋았다. 고려 때 청자 생산의 메카였던 강진, 부안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상감청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백자가 왕실의 그릇으로 자리 잡게 되며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청자를 만들며 살아온 이들에게 느닷없이 백자의 간결한 맛을 만들어달라고 하니 얼마나 난감했을까. 백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흙은 어디서 구할 것이며 굽는 온도는 어떻게 더 올리고 유약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결국 이들이 택한 방식은 기존 청자 표면 위에 백토를 발라 백자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분청사기’라는 용어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분장회청사기’의 준말로 회청색을 띠는 사기 위에 분장을 했다는 의미다. 당시 신기술이었던 백자를 만드는 것보다 당연히 제작하기도 쉽고 단가도 저렴해서 일반 민간의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려의 상감청자와 동일하게 제작했다. 예전처럼 하던대로 했다. 그러나 일일이 문양대로 동체의 표면을 파서 백토를 채워야 하는 상감기법이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가다 보니 겉보기에 비슷하게 보이도록 미리 문양을 새긴 도장으로 찍은 후에 백토를 채우는 인화문기법이 유행했다.
수요가 많으면 변화는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민간에서 유행한 분청사기에 새로운 장식기법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왕실에서는 백자를 사용하고, 민간에서만 분청사기를 사용하면서 분청사기 기법에 자유로움을 가져왔다. 백토를 바른 다음에 문양에 맞춰 긁어내는 박지 및 조화기법, 철화안료로 간략하게 묘사하는 철화기법 등 비로소 분청사기의 개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점차 민간에서도 백자에 대한 동경과 수요가 강렬해지면서 분청사기의 개성보다는 백자처럼 하얗게 보이는 분청사기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지금 시각으로 봐도 대단히 모던해 보이는 귀얄기법과 덤벙기법은 이런 흐름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처음에는 뻣뻣한 귀얄 붓으로 표면의 거친 질감을 가리는 정도로 칠하는 수준에서 아예 백토물에 담궈 백자인듯 보이는 덤벙기법으로 바뀌었다. 백자를 닮고 싶어 시작한 것에서 이제는 거침없는 필치와 세세한 것에 개의치 않는 담대함이 분청사기의 매력으로 자리잡았다.
대개 문화는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신분제 사회였던 전근대에는 문화를 주도해 나간 계층이 상류층이었고 민간에서는 이들의 문화를 따라하면서 새로운 문화로 발전시켜 나갔다. 신분제가 없어진 현대에도 신분의 차이만 없을뿐 문화를 주도해 나가는 사람이 있고 이를 저변화하며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매한가지다. 분청사기도 처음에는 왕실에서 사용하는 백자를 따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도자였다.
당시 도공들의 마음과 일상을 가만히 상상해보면 급변하는 사회의 요구와 분위기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며 바삐 지냈을 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바쁜 와중에도 과거의 유산과 권위에서 벗어나 전통을 재해석하고 그에 걸맞는 기법을 만들어 서툴어 보이지만 철저하게 계산된 새로운 미감을 만들어냈다. 문화는 늘 이렇게 변화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