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가란 미술이라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취미로 미술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미술관, 아트페어,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는 작가들은 한 명의 직업인으로서 활동을 하는 프로 화가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옛날에는 미술은 어떤 사람들이 그렸던 것일까요? 그리고 동양과 서양에서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동양과 서양 모두 미술을 전문적으로 하는 직업군이 있었습니다. 회화를 중심으로 보면 전문화원, 전문화가, 직업화가로 부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홍도, 장승업 같은 이들이 전문화원 출신 화가였죠. 그리고 이들이 일했던 곳은 왕실 소속의 도화서라고 부르는 화원들이 일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서양에서도 프랑스의 궁정 화가로 활동했던 자크-루이 다비드처럼 왕실에 소속되거나 혹은 페테르 파울 루벤스처럼 직접 공방을 운영하며 작품 주문을 받아 제작했던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루벤스의 공방은 중세부터 일반화되어 있던 대표 작가의 공방 운영 방식을 보다 체계화시킨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를 각기 재능이 있는 제자들에게 나누어 일임하고 자신은 최종 수정을 하거나 서명을 함으로써 하나의 ‘루벤스 작품'이 탄생하는 방식이었죠. 지금 봐도 굉장히 전문적이고 비즈니스적인 활동 같습니다. 이처럼 소위 프로라고 할 수 있는 직업 화가들은 동서양 모두 중세부터 진행되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전문 화가뿐만 아니라 다른 독특한 직업군의 화가도 있었습니다. ‘문인화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그림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본래 출신은 사대부로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과거시험을 보고 관료가 된 이들을 의미합니다. 즉 학자, 관료, 문장가였던 것이죠. 한국과 중국의 미술사에서는 이들이 당시 그림의 트렌드를 주도할 때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왕실 소속 화가나 시장에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전문 화가들보다 신분이 높았고, 학자 출신답게 미술에 대한 생각을 이론화할 줄 알았기 때문이죠. 일본의 경우는 사대부라는 신분 계층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 중국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이들 문인화가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중국 북송대(960-1127) 이후 부터입니다. 특히 산수화를 으뜸으로 여겨 이를 중심으로 회화이론이 정립되었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종병(375-443)에 의해 좋은 산수화의 기준을 ‘누워서도 충분히 감상하며 마음으로 노닐 수 있는 그림’으로 정의를 내린 이후 수많은 회화이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를 종합하여 정리한 시대가 북송대였습니다. 북송대 문인화가들은 소식(1037-1101)이 “그림에서 형태가 닮았는지 아닌지를 논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식견과 같다"고 하는 등 형태를 그대로 따라 묘사하는 것보다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산수처럼 자연 경물은 어차피 일정한 형태가 없기에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하는 것은 직업 화가들이 할 일이지 사대부 출신 화가들은 학식과 인품을 바탕으로 자연의 본질을 깨우쳐 이를 그림으로 그려야한다고 봤죠.

혹은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고 주장하며 문학과 회화의 연계성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시를 읊으면 그림이 절로 그려져야 하고, 그림을 보면 절로 시의 운율이 떠오르는 게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 것이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들은 그림을 직업으로 삼은 궁정화가들이 아니라 원래부터 시를 짓고, 글을 쓰던 사대부 출신들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림을 그릴 때 기법 연마만 해선 안되고 학식을 쌓아 문학같은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이러한 회화이론을 ‘시화일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같은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로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의 여행을 해야한다”고 하며 학문과 자연에 대한 경험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학습 방법을 거친 자만이 “가슴과 손이 서로 응하며" 좋은 그림이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와 그림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한 유명한 문장 중에는 “시의 요체는 고독이요, 그림의 요체는 고요함이다"가 있습니다. 특히 혼란스러운 시대에 이런 작품들이 유행했습니다. 세상의 혼란이 심해지면 자연스럽게 관직에서 물러나 세상을 등진 채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사대부들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작품 중에는 중국 원나라의 예찬이 그린 <용슬재도>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는데 중국 미술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스산한 풍경 때문에 그린 사람의 고독한 심정이 느껴지죠. 이렇게 물기가 없는 붓으로 까끌까끌하게 그리고 잎들이 듬성듬성 나있는 나무 몇 그루와 비어있는 정자는 세상을 등진 사대부의 고독한 정신세계를 상징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에 영향을 받은 유명한 그림이 있죠. 여러분도 잘 아시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입니다. 이 작품은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를 가있던 시절에 한결같이 자신을 챙겨주던 제자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선물하기 위해 그린 겁니다. <세한도> 역시 예찬의 <용슬재도>처럼 물기가 없는 붓으로 성글고 거칠게 그렸습니다. 텅 비어있는 공간에 누추한 가옥 한 채와 소나무, 측백나무를 그렸습니다. 아마도 인적없는 비어있는 가옥은 유배지에 묶여있는 자신의 쓸쓸함이고,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제자의 한결같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궁정회화처럼 기법적으로도 화려하고 치밀한 그림도 물론 제작되었지만 이처럼 사대부들이 회화 제작의 주체로 등장하면서 기법을 넘어 한 편의 시 같은 그림도 오랜 세월동안 발전해왔습니다.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이후로 전문 작가들이 주문을 받아 제작하는 방식을 주로 취해왔습니다. 한국과 중국처럼 사대부 계층도 없었거니와 문인이 미술가처럼 미술을 제작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소위 ‘프로' 화가들이 주문을 받아 미술을 제작해왔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암굴의 성모>는 주문 제작과 관련해서 재밌는 에피소드를 갖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성 프란치스코회의 평수사회인 무염시태(성모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 수도회로부터 제단화로 주문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현재 파리 루브르박물관본과 런던 내셔널갤러리본 두 점이 전해집니다. 이 주문과 관련하여 법정 다툼이 벌어졌고 현재 관련 기록이 전해져서 이 작품을 둘러싼 당시 정황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1483년에 처음 주문을 받았을 때 레오나르도는 데 프레디스 형제와 함께 제작하는 것으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3폭 제단화 중 가운데에 성모 마리아상을 그리고, 양 옆 폭에는 데 프레디스 형제가 천사를 그리기로 했죠.

그러나 어쩐 일인지 레오나르도는 작품 완성을 차일피일 미뤘고 이미 자기 몫을 끝낸 형제들이 완수금을 지급해달라며 수도회측에 소송을 걸었습니다. 결국 판결이 1506년에 났는데 프랑스에 가있는 레오나르도를 불러와서 작품을 완성토록 하고, 완수금을 지급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듬 해에 돈을 지급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 와서 완성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레오나르도는 왜 거의 비슷한 그림을 2점이나 그렸던 걸까요?

본래 레오나르도가 주문받은 내용은 성모 마리아상이었습니다. 당시 이 주제는 성모 마리아가 원죄가 없음을 언급한 책을 든 채 예언자들 가운데에 아기 예수 없이 홀로 서 있는 모습으로 그리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런 전통에서 벗어나 당시 피렌체에서 인기있던 암굴의 성모로 대체하여 그렸습니다. 이게 먼저 제작된 루브르박물관본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누가 세례 요한인지, 아기 예수인지 구분이 힘들었고 예수님으로 추정되는 아기가 심지어 화면의 가장 밑단에 배치되어 불경스럽게 보였을 겁니다. 더구나 화면 속 인물들에 성인을 상징하는 휘광조차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아마 수도회측에서 항의하여 다시 그린 게 내셔널갤러리본이 아닐까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내셔널갤러리본에는 세례 요한을 상징하는 십자가 지팡이를 그려넣어 세례 요한을 증명하고, 화면 오른쪽의 천사를 제외하고 모든 인물 머리 위에 휘광을 넣음으로써 전통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현재 정확한 자료가 전해지지 않아 2점을 그린 이유에 대해서는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두 작품 모두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이 맞다고 확인된 상태이긴 합니다. 일단 위작 논란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옛부터 화가가 하나의 직업인으로 종사하며 주문을 받아 제작, 납품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동양에서도 미술시장이 형성되어 거래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사대부라고 하는 동아시아만의 화가계층이 별도로 있었다는 점이 서양과 가장 큰 차이입니다.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차이가 서양에서는 미술의 전개가 기법의 발전과 크게 관련있다면, 동양에서는 기법을 포함하여 사대부를 중심으로 예술철학이 보다 다채롭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