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원 전시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회고전의 형식이지만 나열하지 않았다
'행복한 화가'
이대원(1921–2005)에게 오래 따라붙은 말입니다. 과수원과 산과 연못을 원색으로 채운 화면이 워낙 화사해서, 우리는 그의 그림을 먼저 밝고 편안한 풍경으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회고전은 화가의 전체 작품세계를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하면서도 자칫 평이해질 수 있는 전시 형식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 맞춰 시기별로 작품들을 전시하면, 관람객은 작품의 변화를 따라가기는 해도 작품 자체를 읽지 못한 채 전시실을 나오기 쉽습니다.
‘몇 년도에 화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슬펐고, 기뻤고, 그런데 그때 이런 작품을 그렸구나’ 정도에 그치게 되죠. 특히 이대원처럼 이미 하나의 수식어로 굳어버린 화가라면, 회고전은 그 수식어를 재확인하는 자리로 끝나버릴 수 있습니다.
요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하고 있는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전시는 회고전의 형식이긴 합니다. 그러나 시대순 나열에 머물지 않고 '이대원을 어떻게 다시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관람 동선 전체에 심어 두어 시대순으로 따라가면서도 작품을 보는 관점을 제안합니다.
제목에서 먼저 관점을 드러내다
이 관점은 전시 제목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우리나라 고고학과 한국미술사의 학문적 기반을 마련한 삼불 김원룡(1922-1993)이 이대원의 그림을 두고 남긴 말에서 차용한 겁니다. 원래 문장은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였고, 밝고 생명력 넘치는 화면에 대한 애정 어린 찬사였습니다.
‘사람’을 ‘당신’으로 바꾼 작은 변화에 불과하지만 이 선택에 기획 의도가 잘 담겨 있습니다. 익숙한 찬사를 타이틀로 세워 전시 초입에 세워두되, 전시 자체는 그 밝음이 타고난 낙천에서 온 것이라는 쉬운 결론이 아니라 오랜 관찰과 실험, 절제 끝에 얻어진 조형적 성취였음을 보여주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행복한 화가'라는 프레임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 프레임을 입구에 두고 안에서 조용히 뒤집는 구성입니다.
관점을 제안하다

전시에서 제안하는 관점의 핵심은 이대원의 색점을 어디에 놓고 볼 것인가에 있습니다.
그의 화면을 보면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이 먼저 떠오릅니다. 원색의 점을 촘촘히 찍어 나간 표면이 조르주 쇠라(1859–1891)를 쉽게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쇠라의 점이 일정한 거리에서 눈 속에서 섞여 새로운 색과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이대원의 점은 다릅니다. 빨강과 파랑, 보라와 초록이 하나의 중간색으로 융합되지 않고 저마다 제 색을 지킨 채 겹겹이 쌓입니다. 멀리서 보아도 점 하나하나의 존재감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쇠라가 눈에서 섞여 사라지는 점이라면 이대원은 표면에 물질로 남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이대원이라는 화가의 좌표를 서양 회화에서 동아시아 회화로 옮겨 놓기 때문입니다. 그는 명암법과 원근법을 멀리하고 화면을 평면으로 다뤘으며, 산과 나무를 그릴 때는 쌀알 같은 점을 겹쳐 찍는 미점준(米點皴)의 방식을 유화로 옮겼습니다. 그림자를 지우고 깊이 대신 평면을 택한 그의 점은 처음부터 신인상주의가 아니라 동아시아 회화의 어법에서 출발한 겁니다. 그의 그림이 오래전부터 '서양 물감으로 그린 동양화'라 불려 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말 대신 작품으로 논증하다

전시는 관점을 말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작품으로 보여줍니다.
전시실에는 이대원의 회화 사이사이에 그가 평생 곁에 두고 아꼈던 자수, 나전, 목기, 도자 같은 전통 공예품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서로 다른 색실이 제 색을 간직한 채 화면을 이루는 자수, 검은 옻칠 위에서 프리즘처럼 빛을 내는 나전 등 색이 섞여 사라지지 않고 물질로 남는다는 그 감각이, 이대원의 색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없이 가리킵니다. 관람객은 '이대원의 점은 동아시아 전통에서 왔다'는 흔한 문장을 읽는 대신 회화와 공예를 나란히 보며 그 영향 관계를 스스로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미술사의 주장을 전시의 언어로 잘 풀어낸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순을 따르되, 세로축을 세우다

전시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경성제2고보 시절 스승 사토 구니오와의 인연과 초기작에서 출발해, 앵포르멜이 유행하던 시기에도 자기 화법을 유지한 과정, 그리고 색점과 색선을 켜켜이 쌓아 완성한 후기의 대형 연작으로 이어집니다.
형식만 보면 익숙한 시대순입니다. 그러나 각 섹션이 단순한 시기 구분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 아래 놓여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두 번째 섹션은 '이어가되 휩쓸리지 않다'라는 주제로 추상이 대세이던 시절에 이대원이 유행을 좇지 않고 자기의 조형 언어를 밀고 나간 선택을 조명합니다. 시간을 따라가는 가로선 위에 '이 화가를 왜 지금 다시 봐야 하는가'라는 세로축이 겹쳐 있는 겁니다.
전시를 보러 가면 <사과나무>(2000) 앞에 오래 서 보시길 권합니다. 색점 하나하나가 어떻게 칠해졌고 어떤 존재감으로 남아 있는지 가까이서 살펴보면, 그 점들이 무언가를 위해 종속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느낌은 '행복한 화가'라는 익숙한 수식어에 가려져 있던 동아시아 회화 전통과 공예의 감각을 현대 회화의 언어로 옮긴 이대원의 성취로 이어지게 됩니다.
좋은 전시란 여러 기준이 있지만, 한 작가의 연보를 채워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를 다시 읽을 수 있는 관점 혹은 좌표를 관람객에게 제안하는 전시도 포함됩니다.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전은 이 관점을 분명하게 제안하는 전시입니다. 고미술과 근현대 미술은 동시대 미술의 전시처럼 기후위기, 인종 문제와 같은 현재 사회에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화두로 던질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치 고요한 연못에 돌 하나를 던지듯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에 파동을 일으키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점을 이 전시는 마지막까지 잔잔하게 밀어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