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워싱의 역사-권력이 예술을 빌리는 방식

6월 4일(목) 서울 여의도에 '퐁피두센터 한화'가 문을 열었다. 개관을 앞두고 미술관 앞에서는 아트 워싱(art washing)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아트 워싱은 예술을 방패삼아 기업의 이미지 세탁이나 젠트리피케이션을 가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번 집회 역시 방산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기업이 예술 후원을 통해 기업의 이미지를 포장하려 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가볍게 넘길 문제 제기는 아니다. 다만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묘하게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이 권력이나 자본과 손잡거나 종속되었던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술은 세속과 떨어진 상태에서 마치 무균실에 있는 것처럼 홀로 존재했던 적이 없다. 정확하게는 세속에서 멀어지려는 목표는 있었으나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후원자의 돈과 권력자의 의도는 늘 미술의 곁에 있었고, 걸작이라 불리는 많은 작품이 바로 그 울타리 안에서 태어났다.
이번 아트 워싱 반대 집회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행동이고, 이런 움직임이 결국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점도 분명하다. 다만 그 비판이 예술은 권력이나 자본과 거리를 두어야만 옳다는 인식으로 나아갈까 우려된다.
이 글에서는 지금의 잣대로 보면 아트 워싱이라 부를 만한 역사 속 대표 사례들을 지역별로 선정했다.
1. 유럽

고대 로마 : 아우구스투스의 제정(帝政) 정당화
고대 로마는 처음에 왕정에서 시작하여 공화정으로 체제가 바뀌었다. 이후 귀족 중심의 합의체였던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사실상 1인 지배 체제를 세운 것은 아우구스투스(63 B.C.-A.D. 14)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거머쥐었지만 그의 뒤에는 내전과 정적 숙청이라는 과거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 같은 시인과 당대의 조각가, 건축가들을 대대적으로 후원했다. 황제인 자신을 신격화하고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찬양하는 조각과 건축물을 로마와 제국 전역에 세우면서 자신을 독재자가 아니라 평화의 수호자로 각인시켰다.

르네상스 피렌체 : 메디치 가문의 금융업과 후원
르네상스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로 칭송받는 메디치 가문의 부는 당시 가톨릭 교리에서 죄악으로 여겨지던 고리대금업, 즉 금융업에서 나왔다. 부의 출처를 향한 시민들의 거부감을 무마하기 위해, 가문은 도나텔로와 미켈란젤로 같은 거장들을 후원하며 종교 미술과 공공 예술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 부의 부도덕성을 문화적 고결함으로 바꾸어 놓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20세기 나치 독일 : 전체주의와 학살의 은폐
히틀러와 괴벨스는 전체주의와 유대인 학살이라는 현실을 가리기 위해 예술을 도구로 삼았다. 이들은 인종주의의 의거해 한편으로는 현대 미술을 '퇴폐 미술'로 규정하며 탄압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장려하는 고전주의 조각과 건축, 레니 리펜슈탈의 선전 영화 등을 통해 체제를 미화하며 국민을 단일대오로 모이게 했다. 억압과 미화는 같은 정책의 양면이었다.
2. 미국

도금 시대(Gilded Age) : 재벌들의 미술관 설립
록펠러, 카네기, 프릭, J. P. 모건은 독점과 노동 착취, 노조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다. 1892년 홈스테드 파업의 유혈 진압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막대한 자금으로 유럽의 명작을 사들인 뒤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The Frick Collection, The Morgan Library & Museum)을 세우거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대규모로 기부했다. 그 결과 현재 이들은 악덕 자본가가 아니라 문화의 후원자로 기억되고 있다.

냉전기 : CIA의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후원
1950~60년대 냉전기, 미국은 문화적 자유주의를 내세워 공산주의 진영에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USIS, CIA가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전시를 막후에서 지원하고 순회전을 열었다는 사실은 이후 여러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자국 내 인종 차별과 매카시즘을 가린 채, "미국은 우상화가 기본이된 공산주의 국가와 달리 전위 예술을 포용하는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심으려 한 국가 주도의 기획이었다. 우리나라도 1950년대에 이들의 전시가 개최되면서 추상미술이 유행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3. 한국

조선 : 왕위 찬탈 이후의 불교 미술 후원
정변을 통해 왕위에 오른 군주들은 정당성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대규모 불사(佛事)를 일으키거나 왕실 원찰을 조성했다. 조카 단종을 폐하고 즉위한 세조가 대표적이다. 그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경을 한글로 번역 · 간행하고, 원각사(圓覺寺)를 건립하는 등 불교 문화와 미술을 대대적으로 후원했다. 세조는 본인이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했으나, 찬탈 과정에서 발생한 권력 투쟁의 잔혹함과 도덕적 결함을 종교적 자비와 대규모 불사를 통해 상쇄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여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 조선미술전람회와 문화정치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기조를 바꾸었고,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를 운영했다. 이 전람회에서 식민 지배의 현실을 가리기 위해 조선의 한가로운 풍경과 '향토색' 짙은 화풍을 장려하고 입상시켰다. 식민 통치를 문명화와 문화 진흥으로 포장한 셈이다.
대표적인 매국노 이완용 역시 미술의 권위를 빌렸다. 나라를 판 대가로 부와 작위를 얻은 그는 1911년 출범한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의 회장을 맡았다. 조선총독부의 후원 아래 운영된 이 서화 교육 단체의 강습소에서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은 안중식 · 조석진에게 그림을 배웠고, 이들은 훗날 근대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성장했다. 이완용은 그 조직의 회장이자 후원자로 자리하며 식민지 조선의 문화를 지키는 인사라는 이미지를 얻으려 했다. 그는 당대에 명필로도 이름이 높아 일본인들까지 글씨를 청할 정도였고, 조선미술전람회 서예 부문 심사를 여러 차례 맡으며 예술가로서의 위상까지 다졌다. 다만 최근의 연구는 그 '명필'이라는 평판이 실제 기량보다 그의 정치적 위상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고 보는 편이다.

1970~80년대 : 민족기록화 사업
박정희 정권은 유신 체제의 정당성 문제와 민주화 운동 탄압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덜고, 경제 개발과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선전하기 위해 국가 주도의 '민족기록화' 제작을 추진했다. 1967년부터 1979년까지 문예진흥원의 지원 아래 수십 명의 화가가 동원되어 100점이 넘는 대형 회화가 제작되었다. 한 축은 역사 속 전쟁 영웅의 국난 극복과 월남전을 다룬 '구국위업'과 '전승'의 서사였고, 다른 한 축은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새마을운동 현장을 거대한 화폭에 담은 '경제 건설'의 기록이었다. 국가가 예술에 직접 개입한 대표적인 사례다.
4. 동아시아

청 건륭제 : 문자옥(文字獄)과 대규모 문화 사업
건륭제 시기는 한족 지식인을 검열하고 사소한 문구를 빌미로 처형하는 문자옥(文字獄)이 절정에 이른 때였다. 동시에 건륭제는 방대한 총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고 황실 컬렉션을 확장했으며 불교 사원과 미술품을 후원했다. 현재 걸작으로 평가받는 중국의 서화 작품들에서 건륭제의 인장이 날인된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다. 사상의 저항을 억누르면서도 스스로를 문화예술적 소양이 깊은 군주로 내세운 것이다. 검열과 후원은 별개의 일이 아니라 예술을 표면에 내세운 하나의 통치술이었다.

일본 : 전쟁기록화(戦争画)와 대동아공영권 선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부는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를 비롯한 화가들을 종군 화가로 전선에 보냈다. 이들이 그린 거대한 전쟁기록화는 침략과 수탈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실현'이라는 구원의 서사로 옮겨 놓았다. 침략의 잔혹성과 전쟁의 공포를 예술적 비장미로 포장한 사례다.
이 사례들을 가로지르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권력과 자본은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예술의 아우라를 빌려 왔다. 이는 예술에게 기대하는 숭고함과 아름다움이 그만큼 강력한 설득의 언어로 작용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퐁피두센터 한화를 둘러싼 논란은 전에 없던 사건이 아니라, 미술과 권력 · 자본이 맺어온 오래된 관계가 현재 다시 불거진 장면에 불과하다. 집회에 나선 이들도 예술을 권력과 자본에서 떼어내 무균실에 가두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상황에서 필요한 건 무엇일까?
후원의 손길을 무조건 밀어내는 결벽이 아니라 그 손길이 무엇을 가리려 했는지, 그리고 예술 후원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지 읽어내는 눈이다. 미술이 권력 · 자본과 얽혀온 역사를 알수록 우리는 작품 앞에서 미적 가치와 겉포장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아트 워싱을 경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후원을 끊어 예술을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잘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