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책,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됩니다.

미술사 책,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됩니다.
『동양화가 처음인 당신에게』 中

한번쯤 미술사 공부를 제대로 해보려고 미술사 개론서를 펼쳐놓고 1장부터 읽기 시작한 분이 많을 겁니다.

선사시대, 이집트, 그리스. 이렇게 하면 한 달이 지나도 중세까지 가지도 못합니다. 한국미술사라면 선사시대 암각화에서 출발해 삼국시대 어딘가에서 멈추곤 하죠.

“순서대로 해야 제대로 공부하는 거 아닌가?”

이 생각이 미술사 공부를 어렵게 만드는 첫 번째 원인입니다. 아마 모든 공부가 그럴 거예요.

책을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선 관심 있는 시대부터, 손이 가는 대로 읽어보세요. 시대순 정리는 이렇게 순서를 정하지 않고 관심있는 시대부터 한 다음에 해도 충분합니다. 오히려 이게 훨씬 효율적입니다.

미술사 공부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미적 경향, 즉 트렌드를 이해하는 게 시작입니다. 석굴암 본존불상은 왜 그토록 사실적이면서도 웅장한 모습인지, 분청사기는 왜 점점 백토 분장이 많아지게 되었는지, 18세기에는 진경산수화가 왜 크게 유행했는지 등. 이런 '시대의 대표적인 미적 경향'을 이해하는 게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경향은 언제나 그것을 주도한 대표 작가들과 그들의 대표 작품을 통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쉽게 말하면 트렌드 세터 역할인 거죠.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통해 진경산수화의 특징을 정리하고,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통해 조선 초기에 유행한 화풍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큰 줄기를 먼저 잡아두고 그 다음에는 차분히 살을 붙여 나가면 됩니다.

반대로, 목차 순서대로 공부하면 암기 위주로 갈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점점 지치고 맙니다. 작가 이름, 작품 제목, 제작 연도를 정리하면서 진도를 나가면 공부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정작 왜 그 시대에 그런 양식이 등장했는지, 왜 그 작가가 그 방식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는지와 같은 ‘맥락’을 붙잡지 못한 채 지식이 따로따로 흩어지고 말죠.

만약 미술사 공부를 제대로,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면, 관심있는 시대에서 출발하고, 그 시대의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으로 뼈대를 세우고, 거기서부터 앞뒤로 가지를 뻗어나가듯 유연하게 해보세요. 이렇게 한 다음에 시대순으로 다시 읽으면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올 겁니다. 그후에는 즐기듯 전시도 보고, 다큐멘터리도 보고, 관련된 역사책을 읽으면 차곡차곡 쌓이듯 지식의 살이 붙기 시작합니다.

Read more

변화의 시대, 한결같음으로 거장이 된 화가 유영국

변화의 시대, 한결같음으로 거장이 된 화가 유영국

미술사에서는 화풍의 변화가 많은 화가들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변화를 위한 그들의 실험 및 도전정신, 작품의 혁신성 등이 미술의 새로움을 위한 발전을 이끌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응노는 문인화에서 시작하여 일본 신남화, 반추상회화, 앵포르멜, 문자추상 등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렇게 다양한 화풍을 보이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변화무쌍했고,

By Lee Janghoon
기교라는 치명적인 유혹

기교라는 치명적인 유혹

“평담하고 천진한 것이 많아 당나라에도 이러한 품격은 없어 필굉의 위에 있으며, 근세의 신품 중에서도 격이 가장 높아 더불어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 산봉우리들이 들고 나며 구름과 안개가 끼고 걷히는 데 교묘한 뜻을 꾸미지 않아 모두 천진함을 얻었다.” - 미불(米芾), 『화사(畵史)』 예술가에게 가장 치명적인 유혹은 기교에 빠지는 일이다. 캔버스

By Lee Janghoon
미술 콘텐츠 크리에이터에게 필요한 건 정보가 아니라 관점이다

미술 콘텐츠 크리에이터에게 필요한 건 정보가 아니라 관점이다

미술사를 공부해서 미술 관련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중 많은 분들이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내가 알려주는 정보를 사람들이 구글이나 AI로도 알 수 있는데, 굳이 나를 찾을 이유가 있을까?" 저도 늘 같은 고민을 하지만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은 앞으로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술사 연도, 사조의

By Lee Janghoon
새로운 툴을 익혀도 달라지지 않는 이유

새로운 툴을 익혀도 달라지지 않는 이유

SNS를 보다가 새로운 AI나 플랫폼을 발견하면 저장하기에 바쁩니다. 문제는 저장만 하고 따로 정리해서 내 것으로 소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죠. 새로운 걸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늘 있습니다. 온라인 강의를 결제하고, 생산성 앱을 깔고, 업계에서 뜨고 있는 프레임워크를 공부합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내 업무에 밀착되어 꾸준히 쓰고 있는 건 얼마나 될까요? 저는 이

By Lee Jangh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