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국의 회화, 변하지 않음으로써 도달한 깊이에 대하여

유영국의 회화, 변하지 않음으로써 도달한 깊이에 대하여
일본 유학시절의 유영국,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의 추상회화에 대해 처음 공부를 할 때 뭔가 알 수 없는 의문이 들었던 적이 있다. 답을 알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물음 자체가 떠오르지 않고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묘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공부해왔던 미술사 속 여러 미술가들과 뭔가 결이 다르다는 느낌이긴 했는데 정확한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니 그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일단 묵혀 놓으면 언젠가 불현듯 떠오를 때도 있기 때문에 에버노트에 이 묘한 느낌을 기록하고 잊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유영국에게 가진 묘한 느낌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미술사에서는 대개 변화를 추구했고, 성공하며 혁신을 이끈 작가들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응노가 대표적이다. 그의 회화는 문인화에서 앵포르멜, 문자추상까지 넘나들 정도로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게 가능한가 싶을 만큼 변화무쌍한 화풍을 보였다. 미술사에 기록된, 소위 ‘거장’이라 불리는 대다수의 미술가들이 그러했다.

그런데 유영국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문화학원(文化学院) 유화과에 입학한 뒤 한결같은 추상화풍을 유지했다. 추상도 여러 프리즘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기하학적 추상, 절대 추상, 심상 추상 등 여러 변화를 갖긴 했지만 추상이라는 조형언어에서 벗어난 적은 없다.

미술사학계의 연구, 미술관 전시를 통한 조명, 비평계의 활발한 논의, 미술시장의 가치 평가, 대중의 선호는 대체로 일관된 역학관계가 작동한다. 이 역학관계는 작품성만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감정을 붙잡을 서사와 상징이 있을 때 평가와 관심의 흐름이 더 쉽게 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영국의 경우는 이를 가동할 만한 ‘드라마틱한 서사’와 ‘문학적 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중섭, 박수근처럼 비극적인 삶이나 요절 같은 신화적 요소를 지닌 미술가들은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며 시장과 평단의 관심을 일찌감치 끌어낼 수 있었다. 그 결과 미술사 연구가 뒤따르면서 작품성 또한 정당하게 평가되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영국은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수단(양조장 운영)이 있었고 덕분에 큰 부침없이 규칙적인 전업 화가의 일생을 보낼 수 있었다. 유영국의 일생에는 낭만적 스토리텔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960~80년대의 미술시장과 비평계는 서정적 내용이거나 문학적인 도상이 포함된 경우에 특히 주목하는 경향이 있었다. 김환기가 대표적이다. 추상회화를 추구하면서도 그의 화풍에는 달항아리, 매화, 사슴, 그리고 뉴욕시절의 전면점화까지 그리움, 한국적인 것, 자연을 통한 서정성이 유지되었다. 그의 높은 작품성과 별개로 일찍 조명받을 수 있었던 건 이러한 이유도 있다는 의미다.

반면 유영국의 작품은 자연을 그리더라도 철저한 기하학적인 선과 면, 그리고 강렬한 원색의 대비로 이루어진 '순수 혹은 절대 추상’이었다. 직관적으로 서정적인 무언가를 느끼기 어려운 화풍이었다.

제도권 화단으로부터 자발적인 고립, 자신을 지지해 줄 학맥과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점 역시 그의 회화가 뒤늦게 조명받는 데 일조했다. 첫 개인전도 1964년 마흔여덟이라는 꽤 늦은 나이에 개최했고 작가에 대한 공식적인 아카이빙도 197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미술본상 수상,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회고전 이후 비로소 시작되었다. 미술을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는 미술사 연구는 당연히 그 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유영국의 회화는 역설적이게도 ‘서사의 부재’가 가장 강력한 서사가 되었다. 그의 회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지점은 작품 바깥의 이야기보다, 작품 안에서 작동하는 조형적 논리가 스스로 권위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비극도, 낭만도, 문학적 상징도 없이 오직 선과 면과 색채만으로 반세기를 버텼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증거가 된 셈이다. 지금 유영국에 대한 높은 평가는 신화가 된 인생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의 조형적 힘에 의한 것이었다. 작품의 가치가 결국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낸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변화가 곧 혁신이고 혁신이 곧 가치라는 공식이 지배적인 미술사에서 유영국은 변하지 않음으로써 도달한 깊이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 우물을 판다는 말은 흔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해낸 작가는 드물다. 더군다나 주변의 무관심과 시장의 침묵 속에서도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그만큼 미술에 대한 관점이 확고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유영국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추상회화의 조형 원리뿐만 아니라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언어를 밀고 나간 태도, 그리고 그 태도가 결국 시간 앞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변화를 종용받고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이분법적인 시대에 유영국은 억지로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는 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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